시도별 작가 여행스케치 "문심(文心)의 땅 해남"
글 | 하린(시인)
해남(海南)은 전남 서남부에 위치한 군으로 동으로 강진 북쪽으로 영암과 인접에 있으면서 서쪽과 남쪽에 바다를 끼고 있는 전남에서 가장 넓은 면적이 있는 곳이다. 해양성 기후로 따뜻한 편이고 농업과 어업이 모두 발달했다.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일까. 해남에는 볼거리, 먹을거리, 느낄거리가 아주 풍부하다.
거기에다 문인들까지 많이 배출되어 한국문학의 산실로 인정받고 있다. 살아 있는 문인들을 제외하고도 작고한 시인들이 유명하다.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고산 윤선도와 김남주 시인, 고정희 시인이 있다. 이 세 명의 시인은 단순히 해남 출신이라는 것 말고도 또 다른 동질성이 갖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현실 인식이 투철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고산 윤선도는 당쟁이 심할 때 남인 출신 문인이었는데, 소신껏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아 유배지를 전전했고,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은 독재와 불합리에 굴복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 세 사람을 만나러 매년 해남에 간다.
고산 윤선도를 만나기 위해서 찾는 곳은 녹우당과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이다. 녹우당(綠雨堂)은 고산 윤선도가 나고 자란 곳으로 후일의 해남 윤씨의 종가가 되었다. 윤선도의 고조부 윤효정(호는 어초은(漁樵隱), 1476 ~ 1543)이 해남군 연동(蓮洞)에 살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효종의 어린 시절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하사한 수원에 있는 사랑채를 영원히 기념하고자, 해상으로 일일이 운송한 후 이전하여, 처음에는 그 사랑채만 녹우당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안채를 다 합쳐서 오늘날까지 녹우당(綠雨堂)이라고 부른다.
녹우당으로 가는 길목엔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500년이 넘는 우람한 은행나무에 매료되어 먼저 은행나무 아래에 선다. 우람하고 듬직한 자태에 ‘아!’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눈을 감고 우거진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어린 윤선도를 생각했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소년이 지나가는 바람과 날아가는 새의 마음을 읽으며 시조도 한 수 읊고 있다.
어린 윤선도를 따라 녹우당으로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기와집 지붕 아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綠雨堂’ 현판이 보인다. 그리고 따사로운 인상의 집 전체가 보인다. 명문가의 고택이라고 하면 대부분 웅장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연친화적인 구조로 주변의 산과 나무, 그리고 햇빛과 어우러져 친근함마저 감긴다.
윤선도의 고조부 어초은의 묘와 제각인 추원당 등을 보고 나서 천연기념물 제 241호인 뒷산의 비자나무숲까지 보고 나면 절로 '오우가(五友歌)'가 떠오른다. 비록 녹우당에서 그 시조가 창작되진 않았지만(해남 금쇄동이 창작 된 곳) 벗으로 삼았던 다섯 가지(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를 충분히 다 느낄 수 있다. 녹우당 일대를 다 보고 나서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으로 가면 윤선도와 그의 가계에 관련된 유물 4천 600점을 볼 수 있다. 눈에 뜨이는 인물이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인데, 그의 유명한 자화상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조선시대 미술의 섬세함을 맛볼 수 있다.
500년 전의 시인을 만나고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수 십 년 전에 활동했던 김남주 시인(金南柱, 1946년~1994년)과 고정희 시인(高靜熙, 1948~1991)의 생가다. 두 시인은 닮은 점이 많다. 가까운 마을에서 두 살 터울로 태어나서 암울한 독재자 시절을 지냈고 시인이면서 사회운동가로 모두 활동했다. 그리고 작고한 시기까지 비슷했다.
김남주 시인 생가(해남군 삼산면 봉학리)를 먼저 찾아갔다. 김남주 시인은 전통적인 농가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시인이면서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자신 스스로 시인이라고 불리기보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전사’로 불리길 원했기에, 그의 생가를 찾는 마음은 경건하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려다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했고, 그 이후에도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었다. 1980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고 수감됐다가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특별 지시로 석방되었으나,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10여간 감옥 생활에서도 250여 편에 달하는 시를 창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의 역할이란 이런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아담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누구나 한번쯤 보았을 친근한 시골집이다. 시비와 김남주 시인의 흉상 등이 없었다면 그냥 친척집을 방문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생가를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 집 위쪽에 올라가니 독방(감옥)이 만들어져 있다. 난생 처음 보는 독방, 그 안에 들어가서 동료에게 문을 닫아 보라고 했다. ‘쾅!’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내동댕이쳐지자 무섭게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 두려운 어둠 속에서 김남주 시인은 멈추지 않고 독재자와 싸우는 시를 썼던 것이다. 절로 감탄스러웠다.
놀라움과 흥분을 뒤로 한 채 고정희 생가(해남군 삼산면 송정리)로 간다. 고정희 생가는 비교적 넓은 들판을 지나가면 나온다. 대문 안쪽에 들어서면 고정희 시인이 김남주 시인 보다는 좀 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을 거란 인상을 받는다. 마당이 넓고 규모가 조금 더 큰 집에 거실도 안락하게 자리하고 있다. 집안의 분위기도 따사롭고 여유로워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거실을 가득 채운 오래된 서적들이 눈에 뜨인다. 빛바랜 표지의 책들을 보니 고정희 시인의 독서량이 짐작된다.
고정희 시인은 5남 3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나서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시인이 되었다. 그 후 14년 동안 무려 열한 권의 시집을 냈으니 평균 잡아 매해 한권씩 시집을 펴낸 셈이다. 성실함과 다산적인 측면이 강한 시인으로 보인다. 기독교적 구원의 세계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고통과 절규가 묻어나는 시도 있지만 4·19, 광주항쟁 같은 참담한 현대사에서 비롯된 사회의식과 민주화에의 열망이 묻어나는 시도 있다. 그리고 여성을 억압해 온 역사와 현실에 대한 분노와 여성해방에의 의지가 묻어나는 페미니즘적인 시도 있다. 이런 다양한 특징 때문에 지금도 고정희 시인의 시는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여성주의)적인 특징은 여성시의 발전에 큰 축을 차지하는 걸로 평가받고 있다.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을 만나면 불합리한 과거사가 떠올라 흥분되고 격양된다. 이런 감정을 다스리기에 좋은 곳이 미황사(美黃寺)다. 미황사는 불교의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하는 고찰로 대웅전은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면서 규모나 정교함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건물이다. 신라시대 의조화상이 창건했는데, 소가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소를 싣고 온 배의 주인인 인도 국왕 금의인(金衣人)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美黃寺)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다 보면 미황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높이 489m의 달마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기암절벽의 조화가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다워 처음 보는 이들은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생생하게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달마산의 기운이 ‘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김남주 생가나 고정희 생가에서 만났던 치열한 현실 세계에 대한 감정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기에 충분한 풍광이다. 미황사는 같은 지역에 있는 대흥사에 비해 웅장하거나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수려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런 아름다운 절이 아직까지 입장권을 받고 있지 않은 점은 놀라웠다. 아마도 현실에 지친 사람들을 포근히 감싸고 싶은 달마산과 미황사의 마음은 아닐는지…….
녹우당에서 고풍스런 시조의 멋을 느끼고 김남주 생가, 고정희 생가에서 현실의 아픔을 만진 후, 미황사에 가서 그 모든 것을 무(無)의 아름다움으로 정화시켰다. 이제 마지막으로 ‘땅 끝’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북위 34도 17분 21초, 국토의 최남단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관광객이 꽤 있다.
땅끝으로 오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노레일, 하나는 도보다. 필자는 도보를 권하고 싶다. 해발 156.2m의 사자봉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천천히 걸으면서 바다와 섬을 생생하게 음미하면 좋겠다. 한번은 시각장애인 시인과 동행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시인은 일부러 모노레일을 타지 않고 직접 걸어서 올라갔다. 바람의 살결과 바다의 냄새를 호흡하면서 한발 한발 옮기려는 의도였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이 온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 아닐까.
정상에 오르면 넓은 바다와 바다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다가 섬을 낳았는지 섬이 바다를 낳았는지 모를 정도로 바다와 섬은 자웅동체처럼 연결되어 있다. 다도해의 절경을 보자 하루 동안 만나고 온 세 시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그들도 분명 저 바다와 섬을 보았을 거고 현재의 ‘나’도 같은 곳을 보고 있다. ‘나’도 그들만큼 치열하게 쓸 수 있을까, 그래 한번 해보자, 반문과 다짐을 동시에 하며 ‘땅끝’을 경쾌하게 내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