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케치 > 충절의 고장, 호서의 중심 홍성(洪城)
글 강병석(소설가)
홍성은 충절의 고장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으레,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어 환란이 끊이지 않았던 이 나라 방방곡곡 어디 충절의 고장 아닌 곳이 있느냐고 반문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러던 사람들도 막상 이야기가 사적 제431호 홍주의사총으로부터 최영장군활터, 성삼문선생유허비, 김좌진장군 생가, 한용운선생 생가에 이르면 입을 다물고 만다.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한 의병장 민종식은 1906년 3월 의병을 규합하여 충청 서부지역의 거점인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현격한 전력의 약세로 수백 명의 의병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때 백병전 끝에 희생된 의병들의 유골이 수십 년 동안이나 여기저기 흩어져 뒹굴었는데, 광복 후 뒤늦게 수습하여 합장한 것이 홍성읍 오관리에 있는 홍주의사총이다. 고려 말의 장수로서 수차례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막고 내란을 평정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워 고려를 수호했으면서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저항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최영장군은, 무속(巫俗)에서 장군신으로 섬기는 실제 역사적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조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우며 우리말 음운 연구에 크게 기여했고,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하자 국새를 안고 통곡했으며, 이듬해 동지들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거열형을 당한 성삼문선생의 유허비는 탄생지인 홍북면 노은리에 있다.
갈산면 행신리에서 태어난 백야 김좌진장군은 홍성에 호명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앞장서다가 광복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였고,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해 총사령관이 되어 1920년 청산리싸움에서 일본군을 대파함 으로써 민족혼을 일깨웠다.
결성군 성곡리에서 출생한 만해 한용운선생은 불문에 귀의한 뒤 ‘불교유신론’을 주창하여 새바 람을 일으켰으며, 3ㆍ1독립운동에 즈음해서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서 선언문에 ‘공약삼 장’을 첨가했고, 1925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해방 직전 심우장에서 입적하기 까지 독립지사로, 선승으로, 민족시인으로 고결 한 삶을 살았다.
예부터 “홍성 가서 말자랑 하지 말고 광천 가서 돈자랑 하지 말라.” 했을 만큼, 홍성에는 말 잘하는 변호사들이 많았고 검찰청과 법원을 비롯해서 없는 관공서가 없었다. 오늘날에야 흔해빠졌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웃한 천안 천원 아산 당진 예산 서산 청양 보령 서천까지 통틀어 10개 시군에 인문계열 고등학교라고는 홍성고등학교뿐이라서 대학 진학에 뜻을 둔 유학생들이 몰려들어 읍내 곳곳에 하숙촌이 발달해 있었고, 장항선 열차에는 통학생들의 책가방이 넘쳐났다. 자연히 홍성은 나라의 인재를 배출하는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니, 용봉산 기슭의 홍북면에 내포신도시가 들어서고 충청남도 도청이 옮겨오게 된 것은 당연한 결실이라 할 것이다.
홍성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아무래도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용봉산이리라. 홍북면에서 예산군 덕산면까지 길게 뻗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여덟 개의 봉우리가 봉황의 얼굴과 용의 자태를 닮았다 하여 용봉산이다. 해발 381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에 올라보면 뒤편에 있는 덕숭산의 수덕사와 견성암이 한눈에 들어오고 뒤쪽 가야산 너머로 서해의 파도가 힘차게 거품을 차올리며, 산의 발치로 흘러내린 물줄기는 건너편 해발 3백94m 백월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와 합쳐 한내를 이루어 홍천부락을 가로지른다.일찍이 풍수를 다룬 책의 하나인 『장서』에 이르기를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땅의 기운이나 생기가 물을 만나 더 이상 흐르지 못하면 뭉치게 되는데, 이때 전후좌우 주변의 산들이 이렇게 뭉친 기운을 흩어지지 않도록 품어 안은 땅이 명당”이라 했거늘, 소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용봉산의 기개가 예사로울 수 없다.
아득한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것까지도 없이 고려 때의 운주가 홍주로 변했다가 1358년 공민왕 때 목(牧)으로 승격하여 서천에서부터 평택에 이르는 5군 14현을 관할했으며, 조선조에도 여러 차례 변혁을 겪다가 1895년에 군이 되었고 1914년에 결성군과 합쳐 홍성군이 되었다는 내력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내포신도시가 그곳에 자리 잡게 된 일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맞은편 백월산(白月山)의 흰백(白)자가 해(日)를 타고 앉은 왕의 모습이고, 용봉산(龍鳳山)의 용(龍)이나 봉(鳳)이 모두 왕을 상징하는 글자이니, 여기에 400년 도읍이 서리라던 『정감록』의 예언이 충청남도 도청소재지로 나타난 것 아니겠는가. 용봉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용봉초등학교에서 10분쯤 올라가면 닿는 용도사에는 8m 높이의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7호 홍성상하 리미륵불이 서있는데, 그 위용이 참으로 볼만하다.
절벽 아래 수직으로 솟구친 거대 자연암석을 깎아 조성한 부처는 얼굴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차츰 넓어지는 원통형으로, 이마가 다소 좁아 보이지만 깊게 파인 활 모양의 양 눈썹이 시원스럽다. 도톰한 눈두덩 아래로 반타원형의 눈을 가늘게 내리뜨고 있는 미간에서 뻗어 내린 코는 우뚝하며 입술은 두툼하면서도 매끄러운데,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고 양 뺨은 살이 많이 올라 불룩 하며, 어깨까지 늘어진 귀가 묵중하다. 자연암석을 그대로 활용한 장대한 몸집에 목이 거의 없이 얼굴과 각진 어깨는 맞닿아 있으며, 신체와 상당부분 합치된 얇은 옷자락은 어깨에서부터 양팔을 감아 앞으로 흘러내리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안으로 하여 배 위에 가만히 대었고 왼손은 내려뜨려 기름한 손가락 끝을 가지런히 모아 붙였다.
용도사에서 다시 오르막을 따라 능선으로 50분쯤 올라 정상을 살짝 넘으면 최영장군활터가 있다. 젊은 시절의 최영장군이 그 자리에서 애마와 내기를 걸고 활을 쏜 다음 달려갔다가 화살이 날아오지 않자 지나가버린 줄 알고 애마의 목을 쳤다는 안타까운 전설이 있다. 그곳에 있는 정자에 올라서면 지난 4월 개청한 충남도청과 아파트단지, 그리고 시가지 조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개활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덕산 쪽의 수암산으로 향하지 않고 계곡으로 내려와 용봉사 오르는 길로 접어들면 또 하나의 부처와 조우하게 된다. 1200여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서있었다는, 아직도 새김이 또렷한 마애불이다. 한때는 수덕사보다도 큰 사찰이었다는 용봉사가 지금은 대웅전과 요사 한 채씩 남았을 뿐인데, 거기서 5분쯤 오르면 보물 355호로 지정된 부처가 또 있다. 역시 자연석을 파내고 새긴 홍성신경리마애석불이다. 넉넉하고 부드러운 얼굴에 햇살을 살풋 받아 문 입가의 웃음이 자비롭다. 전체적으로 윗부분은 정교하게 새기고 아랫부분은 대담하게 생략하여 신비감을 더했다.
홍성에는 그 밖에도 보물 399호로 지정된 결성면 무량리의 고산사 대광보전과 보물 538호로 지정된 대교리의 당간지주가 있고, 사적 230호로 지정된 5백여 미터 길이의 홍주성과 성의 동문이었던 사적 231호 조양문이 있다. 문루에 걸린 편액의 글씨가 대원군의 친필이라는데, 그 진위까지는 알바 없다.
홍성대지진이 휩쓸고 간 뒤 새로 고쳐 쌓은 홍주성 성곽 밖, 홍주아문 뒤편으로 뚫린 길 초입에는 시비(詩碑) 하나가 외로이 서서 오가는 사람을 망연히 내려다본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조 봉건사회에서 홍주목사의 서얼로 태어난 슬픈 운명을 지고 조선 천지를 떠돌며 시를 읊었으며, 한때 허균ㆍ허난설헌 남매의 스승이기도 했던 손곡 이달(蓀谷 李達)이 그 시대 서민의 삶을 조망한 구슬픈 노래 ‘예맥요(刈麥謠)’가 새겨져 있다.
시골 밭집 젊은 아낙네
저녁거리 떨어져서
비 맞으며 보리 베어
숲속으로 돌아오네
생나무에 습기 짙어
불길마저 꺼지도다
문에 들자 어린아이들
옷자락 잡아당기며 울부짖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