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이야기 >한 건축가의 억울함, 크라이슬러 빌딩

계약서만 제대로 썼더라면
지금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있을 수 있게 한 건 건축가 윌리엄 반 알렌이다. 그는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작은 규모의 건축공사를 주로 진행해 왔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윌리엄 레이놀즈라는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지어달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하지만 레이놀즈는 알렌의 첫 번째 설계도면이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바로 퇴짜를 놓았다. 이대로 끝나나 싶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길 최고층 랜드마크 빌딩을 소유하고 싶었던 자동차 재벌 월트 크라이슬러가 그 설계도면을 사게 된다. 당초 246미터 높이의 빌딩은 282미터(첨탑 높이를 포함하면 319.4미터)로 높아졌다. 당시 최고의 높이라는 기록과 빌딩 명칭도 크라이슬러의 이름을 따면서 알렌의 유명세도 빌딩의 높이만큼이나 올라갔다.

하지만 이 영광이 계속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알렌은 건설 총 책임자로 임명될 당시 크라이슬러와 문서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그의 불행은 시작된다. 빌딩이 완공된 후 알렌은 빌딩 건축 예산의 6%(당시 표준 금액), 즉 1,400만 달러 지급 요청을 하지만 크라이슬러는 거절한다. 이에 알렌은 크라이슬러를 고소하고 재판 끝에 승소하여 당초 원하던 금액을 받게 된다. 당연한 요구였지만 이 고소는 알렌에게 함께 일하기 힘든 건축가라는 어이없는 낙인이 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의 명성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공황이 오면서 건축경기는 불황을 맞으며 알렌은 더 이상 날개를 펼 수 없게 되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속담이 있다. 크라이슬러 빌딩이 딱 그 짝이다. 화려함 속에 깔끔하지 않은 뒤끝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거나 크라이슬러 빌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도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빛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