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 오부치 수상 간 [한일 파트너십 선언]은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약속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높이 평가하였고, 한국정부도 일본의 평화헌법 수호와 아시아지역에 대한 경제협력을 평가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일본 내 한류붐과 한국기업의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은 일본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크게 확산시켰다. 3.11 동일본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에 좌절하고 고통을 겪고 있던 일본인들은 성금과 구호대를 보내면서 ‘힘내라 일본’을 외치는 한국인들의 정성에 크게 감동하였다.

물론, 지난 50년간 인적, 물적인 교류 확대가 한일 양국 간 화해협력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 없는 일본정부, 시도때도 없이 독도영유권을 도발하는 것,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교과서 왜곡을 서슴지 않는 행태는 아직까지 양국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남아있다. 일본사회의 우경화와 혐한 시위, 헤이트 스피치도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후 2년가까이 한일 간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냉각된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한일 간 냉각기에도 불구하고, 한일 지자체 간 국제교류와 통상협력은 양국 간 긴장을 완화시키면서 상호이해를 심화시키고 있다. 지방외교의 출발점은 제1차대전 이후 양국 국민간 증오심이 극에 달한 프랑스와 독일 지자체가 풀뿌리 국제교류를 통하여 치유와 화해를 시도한 것이었다. 통일 독일도 서독과 동독의 지자체 간 엄청난 인적, 물적 교류가 있음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한일관계, 남북관계, 중일관계의 대립과 갈등도 지방정부와 시민단체 간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긴장을 완화시키고 상호협력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20세기들어 두 번이나 전쟁을 치른 독일과 프랑스 간 화해와 협력은 수많은 양국간 지자체와 시민교류의 축적이 기반이다. 독일-프랑스 청소년협회, 독일-프랑스 간 대학생 교류, 독일-프랑스 공동 방송채널인 아르테 설립과 운영, 300개가 넘는 양국간 우호협회의 활동, 2,200여 개가 넘는 양국지자체 간 자매결연, 4,300개에 달하는 자매대학 간 상호교류 등 엄청난 시민사회네트워크가 독일과 프랑스를 잇고 있다. 2010년 독일을 방문한 프랑스인은 197만명에 이르며, 양국은 학술, 영화, 박물관 교류, 상호학위 인정제를 추진해오고 있다.

역사논쟁, 영토분쟁, 체제갈등으로 점철된 동북아지역의 분열상은 중앙정부 간 대립과 갈등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동북아 지역통합은 ‘흠결 많은 지역체제’(Stunted regionalism)라고 부를 만큼 많은 모순과 한계를 갖고 있다. 중앙정부 간 화해협력이 어렵다면 지방정부와 시민단체, 지식인연대가 주도하는 교류협력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지방정부와 시민단체 간 인적 교류와 통상협력 등 다양성과 중층성을 지닌 점진적인 네트워크 구축은 양국 국민간 상호이해를 촉진하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

동북아지역은 유럽연합과 같은 지역공동체가 아니다. 중앙정부가 주도하여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내기 어렵다. 따라서 지방정부와 시민단체, 대학과 지식인 간 대화와 협력을 지속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주체가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하다 보면, 그것이 중층적이고 복선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면서 장기적인 협력체제로 형성될 수 있다. 싱가포르의 Chia Siow Yue교수는 지역화와 지역주의를 구별하면서 동아시아 지역내 다양한 교류주체가 주도하는 자발적인 네트워크 구축을 주장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같이 중앙정부가 주도한 지역주의(Regionalism)가 강제적인 제도틀로서 묶어내는 것이라면, 지역화는 지역과 시민 간 교류증가로 서서히 제도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동북아에서 지역화(Regionalization)는 제도적인 협력틀 보다도 인적 교류, 무역과 투자, 노동이동의 흐름이 활발해진 결과, 지역 간 상호의존이 증가해가는 것이다.

지역화(Regionalization) vs 지역주의(Regionalism)

한·중·일이 포함된 동북아지역의 시민교류를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지방정부와 시민단체, 지식인과 차세대들이 주역으로 나서는 것이다. 시민간 생활교류는 그야말로 기층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동북아지역내 시민과 문화교류, 환경협력은 물론이고, 동북아지역 전반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2015년 한일수교 50주년은 한일양국이 이루어낸 성과와 동시에 적지 않은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백 배에 달하는 인적, 물적 교류협력은 커다란 성과물이지만, 역사와 영토갈등은 풀기 힘든 숙제로 남아있다. 이제 중앙정부와 함께 지방정부가 나서야 한다. 중앙정부 간 긴장과 대립을 지방정부가 나서서 완화시켜야 한다. 미래세대인 청소년 교류, 한일해협권 지자체간 무역통상의 증대, 환황해권 내 환경과 관광협력, 환황해권 내 투자유치와 지역개발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한국과 일본의 지방정부는 상호 간 교류협력에 매우 적극적이다. 최근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양국 지방공무원은 교류분량이나 예산배정에서 현재만큼, 또는 더욱 늘려갈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와 영토문제가 지방외교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도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2015년 한일수교 5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양국 지방정부 간 국제교류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신뢰와 화해로 가는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