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는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다. ‘소록’은 작은 사슴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육지인 녹동항과 불과 600m 떨어져 있다. 1996년에 일반에 개방되었고 2009년에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와 더욱 가까워졌다. 섬의 면적은 여의도의 1.3배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내가 소록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한센인들의 마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소록도하면 떠오르는 시 한편이었다.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길'이라는 시다. 한센인들의 고단함을 녹여낸 싯구절을 읽을 때마다 소록도가 궁금했다.

소록도는 한센인들의 애환과 아픔이 서린 섬이다. 1916년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로 수용된 한센인들은 무차별적인 학대와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지금은 600명 가량의 한센인이 거주하며 삶의 희망을 일구고 있으며 한센인을 치료하는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다.

소록도에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중앙공원이다. 중앙공원까지 가는 산책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바닷가까지 약 1km 남짓 이어져있다. 이 일대는 ‘수탄장’이라 불리던 곳으로 환자와 병원 직원들의 생활공간을 구분하던 지역이다. 그리고 마음 아픈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일제는 한센인들을 철저히 외부와 격리시키고 결혼을 금지시켰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와 생이별을 시켰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도로 건너에서 아이를 눈으로만 만나야 했다. 그래서 수탄장은 탄식의 장소다.

중앙공원은 환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곳이다. 1936년에 착공하여 3년 4개월 동안 6만여 명의 한센 환자들이 강제동원 되었다고 한다. 해방 후 공원 명칭이 ‘소록도 중앙공원’으로 변경되었다. 공원 내 정원에는 소나무의 한 종류인 솔송을 비롯하여 황금편백·향나무·후박나무·삼나무·팽나무·종려나무·팔손이나무 등 관상수 100여 종이 자라고 있어 이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록도의 상징인 구라탑이 여기에 있다.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 아래에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한센병 퇴치와 계몽에 앞장선 외국인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를 기리는 공적비도 옆에 서 있다. 구라탑 뒤로는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진 너럭바위가 있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봄 마중을 나왔다. 아직 꽃샘바람이 차갑지만 어느새 사람들의 옷과 표정은 한결 가벼워진 모습이다. 공원 뒤로 마을이 보인다. 한센인들의 마을이다. 그 곳에는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다.

해안의 소나무 숲 사이로 놓인 산책로를 따라가면 국립소록도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병원 앞 해안가에 '애한의 추모비'가 서 있다. 해방 직후에 자치권을 요구하다 집단 학살당한 원생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으로 2002년에 세워졌다. 병원 벽에는 '희망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길이 110m의 옹벽에 소록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표현했다. 병원 뒤쪽으로 소록도 자료관이 있다. 소록도의 자연과 역사, 원생들의 생활사 등이 전시돼 있다. 한센병과 한센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한센병은 약만 먹으면 다른 사람에 옮기지 않는다. 현재 소록도에 있는 환자들은 후유증 때문에 재활치료를 받고 있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료관 앞에 있는 붉은 벽돌의 검시실과 감금실은 소록도의 아픈 과거를 말해주는 곳이다. 한센인들을 불법 감금했던 일제는 여기서 나갈 땐 강제로 정관수술을 자행했다. 당시 시술도구가 그대로 남아있다. 검시실은 사망환자의 사체 검안을 위한 해부실이다. 본인이나 유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었다. 그래서 소록도 사람들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했다. 한센병 발병으로 한번, 시신 해부로 두 번, 장례 후 화장으로 세 번 죽는다는 것이다. 역시 수술대와 검시대, 세척시설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소록도 방문객들은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섬에서 나가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바다는 어느새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났다. 길게 햇살이 늘어진 갯벌에서 마을 주민들이 바지락을 채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삶은 지속되고 있었다.

소록대교와 소록도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거금도의 관문은 2011년에 개통된 ‘거금대교’다. 거금도의 명물로 자리잡은 거금대교는 높이 168m의 주탑 두 개가 케이블로 상판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7km 정도 되는 다리는 육상 구간을 빼고 나면 바다 위에 2㎞ 남짓 걸쳐져 있다. 거금대교는 복층구조로 되어있다. 위층은 차들이 다니고 아래층은 보행자와 자전거의 차지다. 우리나라 복층구조의 다리 중에 보행자 전용으로 만들어 진 다리는 거금대교가 유일하다.

다리 위를 걷다 보면 양쪽으로 바다가 펼쳐져 남도의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가슴 속까지 시원한 느낌이다. 걸어서 다리를 왕복하면 두 시간 정도 소요되며 자전거를 이용하면 더 빨리 왕복할 수 있다. 거금대교 입구에서 자전거를 무료로 빌릴 수 있다.

거금도는 행정구역상으로 금산면에 속한다. 거금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김일기념체육관’이다. 금산면사무소를 지나면 김일기념관과 체육관이 있다. 거금도는 1960∼70년대 국민적 영웅이었던 전설의 프로레슬러 김일(1929∼2006)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84cm 키에 기골이 장대한 거구였던 김일은 어렸을 때부터 근방의 씨름판을 휩쓸고 다닌 씨름꾼이었다고 한다. 김일을 비롯해 고흥에 거구의 씨름장사들이 넘쳐나니 고흥에서 힘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 듯 하다.

김일기념체육관 바로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호쾌한 모습을 기대했던 김일의 동상은 다소 옹색해 보인다. 그 시대에는 누구나 사는 것이 팍팍하던 시대였다.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흑백TV 앞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손에 땀을 쥐고 그의 경기를 보곤 했다. 김일의 박치기가 작렬하면 거구의 상대들이 픽픽 나가 쓰러졌다. 그 모습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삶의 피로를 잊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 당시 김일의 인기는 지금의 스포츠스타 못지 않았다. 1967년, 육지에도 전기가 안 들어온 동네가 많았던 시절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세계챔피언에 오른 그를 불러 “임자의 소원이 뭐냐”고 물었더니 “고향 사람들이 TV로 프로레슬링 경기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한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로 거금도에 전기가 들어왔다.

세대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프로레슬러 김일. 그가 좀 더 그답게 보여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더불어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조금 더 풍성해지길 기대해본다.

김일을 만나고 돌아와 또 다른 거금도를 만날 시간이다. 거금도에는 ‘금산해안경관’이라 불리는 해안일주도로가 있다. 고흥군이 자랑하는 도로로 54㎞에 달하는 거금도 해안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드라이브 코스다. 이 해안도로를 따라가며 만나는 다도해의 풍경은 과연 명불허전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 따라 쪽빛 바다와 그 위에 촘촘히 박힌 수많은 섬들이 번갈아 펼쳐진다. 보통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게 되는 이 해안도로의 첫 번째 전망 포인트는 옥룡마을 버스정류장 부근 언덕이다. 발 아래로 남도의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아마 그 어떤 곳의 버스정류장도 이만한 경치를 가진 곳은 드물지 싶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만나는 오천항은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다. 오천항은 27번 국도의 시점인 포구다. 작은 어촌마을과 그 앞에 떠 있는 섬들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오천항 초입에는 이름도 귀여운 ‘공룡알 해변’이 있다. 수박만한 크기의 갯돌들이 뒹구는 해변이다. 흔히 둥근 갯돌을 ‘몽돌’이라고 부르는데, 여기 사람들은 이곳 몽돌이 유난히 크다고 해서 공룡알이라 부른다. 금방 공룡이 껍질이라도 깨고 나올 듯 큼지막하다.

오천항을 지나자마자 도로 옆 언덕에 조성된 ‘소원동산’도 빼놓을 수 없다. 작은 등대와 고래섬·코끼리섬이 어우러지는 풍경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섬과 섬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만날 수 있는 소원동산은 일출명소이기도 하다. 일주도로가 아닌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도 있다. 용두봉과 적대봉 사이를 지나는 지방도로다. 이곳에서 마주하는 풍경 또한 말그대로 ‘장난이 아니다’. 파성재에서 작은 절집인 송광암 이정표를 따라 산자락을 타고 가면 거금도와 고흥반도의 남쪽 해안, 그리고 거금대교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보이는 그대로 딱 떼어 집에 가져가 걸어놓고 싶을 느낌이 들 정도.

해안도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적대봉은 해발 592m로 제법 높지만, 주차장이 있는 파성재에서 출발하면 왕복 2시간 정도에 돌아볼 수 있어 등산객들도 즐겨 찾는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덤이다. 서쪽은 완도, 남쪽에는 거문도, 동쪽은 여수일대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운 좋은 날이면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3월의 거금도는 파릇파릇 초록의 기운이 넘쳐나는 시기다. 섬 곳곳에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구릉에는 양파와 마늘잎이 햇볕을 쬐고 있다. 고흥은 전국에서 봄 양파가 가장 일찍 출하되는 곳 중에 하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양파는 콜레스테롤 분해와 고지혈증에 탁월하고 성인병 예방에 좋은 건강식품이다. 특히 거금도 햇양파는 풍부한 일조량과 해풍을 맞고 재배되어 수분이 많고 매운맛보다 단맛이 강해 그냥 먹어도 아삭한 식감이 일품이다. 어느새 매화나무도 꽃을 활짝 피웠다. 봄바람에 아스라이 실려오는 알싸한 양파향이 봄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와 함께 눈과 귀를 간지럽혔다. 거금도는 더없이 따뜻한 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