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자체의 장과 의회의원을 직선한 것을 제외하면 지방정부의 권한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지방재정력은 20년 전에 비해 오히려 더 악화됐다. 위임사무뿐 아니라 자치사무도 법령으로 규제하거나 지침을 내려 보내 지방정부가 자주적 입법을 할 여지를 거의 없앴다. 지방정부는 사실상 중앙정부의 하급행정기관이었다. 지방의 잘못된 행정은 그릇된 법령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법령의 위임이 없으면 조례로써 주민의 권리제한, 의무부과 또는 벌칙을 정하지도 못한다. 지방정부형태를 기관분리형으로 획일화했다. 시·도의 행정부시장·부지사를 대통령이 임명하고 시·도의 실·국 수, 공무원 정수까지 중앙정부가 규제한다. 지방의회의 자율권도 침해했다. 국가-지방간의 권한배분과 재원배분, 비용분담에 관한 결정권을 중앙이 전행했다. 이로 인해 중앙과 지방간에 취득세 인하, 복지비용 분담 등으로 분쟁과 갈등이 심화됐다. 지방자치의 사활적 사안의 결정권을 지방정부와 이해관계가 상반될 수 있는 중앙정부와 정치권에 백지위임한 것이다.

지방분권체제의 구축은 다음의 이유로 필요하다.

첫째, 이론적으로 삶의 현장인 지역공동체의 자치, 즉 풀뿌리 민주주의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견지하려면 지방분권은 필수적이며,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견제 균형의 원리’는 입법·사법·행정의 수평적 권력분립뿐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수직적 권력분립도 요구한다. 분권국가 수립을 위해 법체제를 정비하는 것은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정상화하려는 것이다.

둘째, 실제적으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세계화, ‘국경 없는 무한경쟁시대’에는 중앙의 역할이 감소되고, 지방정부가 경쟁의 전면에 등장하여 각 국 지방들이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세계화는 바로 지방화’이다. 지방의 경쟁력 낮으면 나라가 외국상품시장으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중앙집권체제를 고수할 수 없게 됐다. 기업하기 좋은 지역, 삶의 질이 높은 지역을 만들어 지방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이미 분권화된 선진국들조차도 지방분권, 재정분권을 서둘렀다. 영국은 2000년을 전후하여 지방정부 스스로 정부유형을 선택하도록 했다. 중앙집권국가였던 프랑스는 1982년 「시·읍·면, 도, 권역(레죵)간의 권리와 자유에 관한 법률」 등 일련의 입법으로 철저한 지방분권국가로 급선회했고, 일본은 2000년 「지방분권일괄법」을 제정하여 기관위임사무를 폐지하고 사무의 지방이양을 확대했다. 선진국들은 중앙정부의 권한과 지방정부에 대한 간섭(규제)을 줄였다.

셋째, 기술적으로 IT가 발달한 정보사회에서는 정치·행정·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분권화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J. 네이스비트는 ‘메가트렌즈(Megatrends)’에서 정보사회의 주요 특징으로 지방분권화경향을 꼽았다. 대량화·획일화·규격화를 특징으로 하는 산업사회는 자본과 노동을 집중시키는 집권적 성향을 띠었지만, 개성화·다양화·자율화를 추구하는 정보사회는 분권적 성향으로 나아간다는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지방분권화경향은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서유럽에서 나타났다.

이에 반하여 한국은 아직도 중앙집권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지방분권개혁이 성공하려면 중앙이 블랙홀처럼 지방을 빨아들이는 집권체제를 버리고 지방이 중심이 되는 매트릭스(Matrix)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비전 제시와 정부, 정치권, 공무원의 공감대 형성이 필수요건이다. 지방분권특별법을 제정하여 획기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점진적 분권화전략은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다. ‘지방분권일괄법’을 제정하여 460여 개 법령을 일거에 개정한 일본의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지방분권개혁위원은 개혁 마인드가 투철한 전문가들로 충원해야 한다. 중앙관료들은 위원이 되어서도, 위원 위촉권한을 행사해서도 안 된다. ‘중앙정부가 권한의 일부를 하향적으로 지방에 이양’해오던 그릇된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모든 사무는 지방의 권한에 속한다, 지방이 처리하기 곤란한 사무에 한하여 중앙이 보충적으로 처리한다’는 원칙에 따라 상향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프랑스의 「권한배분법」(1983년)이 그 모범 사례이다. 지방정부가 처리하는 사무 중 80~85%에 달하는 기관위임사무를 자치사무로 전환하고, 국가-지방간의 협력을 요하는 사무는 ‘공동사무’로 전환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처리하기 곤란한 사무를 관장하는 특별지방행정기관을 제외하고 모든 특별지방행정기관을 지방정부에 이관해야 한다. 특별지방행정기관으로 인하여 빚어지는 종합행정의 저해, 지방정부와의 중복행정으로 인한 비효율과 갈등 , 행정책임의 모호, 민원처리 지연 및 불편 등을 해소해야 한다.

교육감 직선제를 개혁해야 한다. 시·도지사-교육감을 런닝메이트로 하는 안, 시·도지사(교육부시장·부지사) 소속 하에 교육국, 교육관리국을 두는 안(서유럽제국), 시·도지사 소속 하에 합의제 집행기관인 교육위원회를 두고 임기 4년의 교육위원을 시·도지사가 시·도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는 안(일본, 미국 일부 지방정부) 중 택일함이 바람직하다. 자치경찰제를 도입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고(Personal Safety), 사회의 공공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Social Security) 기능을 민주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경찰의 본무라면, 주민생활과 밀접한 민생치안(전자)은 주민에게 가까운 시·도가, 사회안전(후자)은 국가가 담당함이 타당하다. 시·도경찰위원을 시·도지사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고, 시·도경찰청창을 시·도경찰위원회의 제청으로 시·도지사가 임명토록 한다.

지방공무원의 자질 및 능력향상에 주력하여 분권화에 대응하는 지방의 업무처리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중앙관료들은 지방정부의 수용능력이 부족하다며 공공서비스의 질 저하, 방만한 재정운용과 낭비, 지방공무원의 부패 등을 분권 반대이유로 든다. 그러나 지방분권화로 지방이 경험을 축적하면 스스로 역량을 키워갈 것이므로 분권에 대한 중앙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국가-지방간의 재원배분비율은 사무배분비율에 부합하도록 책정해야 한다. 이 비율에 맞도록 국세-지방세의 세목과 세율, 지방교부세의 법정교부율 및 교부세 산정방식, 국고보조금의 규모를 정해야 한다. 보조금은 포괄보조금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헌법 제8장 지방자치’조항을 전면 개정하여 지방자치의 실질적 보장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현행 2개 조문(제117조, 제118조)은 지방자치의 안전장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지방자치를 저해하기도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이념 제시, 지방정부의 종류와 형태, 권한배분 및 ‘보충성의 원리', 자치권(자치입법권, 자치조직권, 자치행정권, 자주재정권) 보장, 국가-지방의 재원배분비율 및 지방재정조정에 관한 조항을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