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역사가 있다. 눈을 질끈 감고 없었던 일인 척 잊어버릴까, 아니면 가슴 아프더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마주할까. 여기 이 선택의 문제에서 후자를 택한 곳이 있으니, 바로 전라북도 군산이다. 군산 내항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에 이어 1899년 5월 1일 개항이 되며 일제강점기 쌀 반출의 전진기지로 활용되며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곳에선 장미동, 월명동, 신흥동 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시대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마을을 만날 수 있었다.

수탈의 역사, 그날의 증거물을 남기다

해망로를 따라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곳이 구 군산세관 본관 건물이다. 이곳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에 대해 세금을 거두기 위한 곳으로 1908년 준공했다. 구 군산세관 본관은 보존이 가장 잘 된 건물 중 하나로 1990년대까지도 업무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내부는 사무책상과 냉난방 시설만 갖춘다면 다시 이용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관리가 잘 돼 있다. 현재는 옛 세관 및 군산항의 옛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과 외국에서 몰래 들여온 가짜 명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이 건물을 서울역, 한국은행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히는데, 이러한 건축사적 의미 외에 곡창 지대인 호남지방에서 쌀을 빼앗아 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서 역사의 교훈을 준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국제 무역항 군산의 옛 모습을 담은 곳이다. 해양물류역사관, 특별전시관, 기획전시실, 근대생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근대생활관은 1930년대 군산 서민들의 삶을 재현해 당시의 모습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일제강점기 군산 최고의 번화가였던 영동상가, 화교 왕흥 신씨가 운영하던 홍풍행 잡화점, 일제강점기 증권거래소라 할 수 있는 미곡취인소 등 실제로 존재했던 11채의 건물에 실제로 들어가 체험도 할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나와 해망로를 따라 가다 보면 초록색 지붕과 하얀 외관에 아치형 창문이 돋보이는 구 일본 제18은행 건물을 보게 된다. 이 건물은 일본의 18번째 국립은행이지만 간판만 은행이지 실제로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대부업이 주 업무였다. 2008년 등록문화재 제372호로 등록되고 보수ㆍ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는 군산근대미술관으로 재탄생 되었다. 일제의 수탈과 강제징용으로 참담한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전시와 함께 근대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기념전시관,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라는 문구 아래 놓인 대형금고, 근대기 군산의 다양한 근대건축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왔던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군산세관, 일본 제18은행과 함께 일제강점기 일본 사업가들의 한국 진출과 미곡 반출, 토지 강매 등 일제 토지 수탈사를 상징한다. 지금은 군산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양한 시청각자료를 통해 일제강점기 군산사람들의 삶,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화폐와 조선은행의 역할, 경술국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 근대 건축 모형 등을 전시하며 당시 우리나라 전체적인 상황을 핵심적으로 담아 보여준다.

역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해망로에서 길을 건너 월명동으로 향하면 자로 잰 것처럼 네모 반듯한 구획을 따라 오래된 가옥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일본식 가옥 풍경이 펼쳐진다. 일본 상인들이 지었던 집이 지금까지 남아 군산시민들의 생활터전이 되어 있다. 원체 오래된 집들이라 낡기도 많이 낡았지만 과거 군산의 모습을 느끼기에는 제격이다. 월명동에서 신흥동까지 걸어가면 신흥동일본식가옥(구 히로스 가옥), 군산부윤관사, 동국사 등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건물들을 더 볼 수 있어 지역 전체가 근대시대가 남겨 준 문화유산이다.

어두운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사적 증거로 보존하는 것 또한, 미래를 위한 길이다. 그것이 바로 군산 근대문화유산마을이다. 단순 관광지 조성을 위한 보존이 아닌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한 민족교훈을 담은 군산 근대문화유산마을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역사적 방향을 제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