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자연, 전통, 사람이다.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은 자연과 전통을 벗 삼아 오랜 시간 더불어 살아왔다. 그래서 전라북도에 오면 사람들이 자연의 맑음을 알고 전통의 푸근함을 닮았음을 알게 된다.

지평선이 머무는 곳, 김제

김제 만경평야에 들어서니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만큼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죽산면에서 광활면으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는 '그 끝을 알 수 없다'하여 만경들이라 불렸다. 곡식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만경들판은 작가 조정래의 글처럼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판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헛제자리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너른 들녘 끝에는 푸른 산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노령산맥의 힘찬 기운이 깃든 모악산이다. 모악산은 김제의 지형을 배반하는 이단아처럼 보이지만, 평야가 갖지 못한 수직의 힘으로 이 지역 신앙의 근거지 역할을 해온 곳이다. 이러한 현상은 산의 기운과 무관치 않다. 모악산의 배꼽 위치에 '오리알 터'가 있고 이곳에서 기운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오리알터는 '올(來)터'의 의미고, 올터는 메시아의 재림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서로 다른 뿌리가 하나로 이어진 땅

모악산의 많은 종교 유적들은 현재와 과거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 백제 천년 고찰 금산사다. 금산사 경내에 들어서면 백제 후기 사찰 건축의 단아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가람 배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고찰의 연륜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국보 제62호)이다. 3층의 중축 구조로 지어진 미륵전은 한국사찰 건축 양식의 백미로 꼽힌다.

미륵전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 공간에 11.8m의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3층을 통으로 튼 높은 공간이 비좁아 보일만큼 거대한 규모의 미륵불은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업멸하고 56억 7천만 년 후에 중생을 제도(濟度)하러 온다고 했다. 미래의 부처 미륵은 과거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가난한 민초들의 정신적 구원자 였고, 오늘도 백발의 노인이 간절한 맘으로 찾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모악산은 예로부터 난리를 피할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왔는데, 증산법종교의 발상지 또한 모악산 자락이다. 증산교는 구한말 어지럽던 세상을 바로잡고 구제하고자 했던 증산 강일순(1871~1909)에 의해 시작된 종교다. 혼란한 세상, 빈천하고 병약한 백성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동곡약방을 열었는데, 그곳이 바로 모악산 금산저주지 건너편 시루봉 아래였다. 사람들은 오늘도 모악산에서 미래의 부처 미륵을 기다리고 있다.

믿음이 만들어낸 성지

1900년대 초엔 개화의 물결을 타고 개신교와 천주교가 모악산에 터를 잡았다. 금산면에 위치한 금산교회는 전국의 개신교인이 성지순례지처럼 들르는 유서 깊은 곳이다. 한옥구조의 교회 예배당은 특이하게 ㄱ자 형태를 띠고 있다. 모서리의 설교 강단을 돌아들면 또 하나 마루공간이 나타나는데 강단의 앞쪽은 남자석, 옆쪽은 여자신도들이 나눠 앉아 예배를 보았다 한다. 100여 년 전 들어온 외래종교와 당시의 유교전통이 만들어낸 특별한 구조인 것이다. 금산면 화율리에 자리한 수류천주성당은 1889년 문을 열었다. 구한말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산 속에 숨어들었다. 당시 수류성당은 전라북도는 물론 호남의 주요 천주교 근거지였고,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켜냈다. 이런 역사 때문인지 수류성당은 그 동안 수많은 신앙인뿐 아니라 사제들을 배출했다. 고은 시인은 모악산을 '산이 아닌 어머니'라고 읊었다. '홀로 높지 않고 타지 사람들마저 품에 들여 마치 어머니 품 속 같다'고 썼다. 각 종교의 정당성과 사상을 떠나 언제나 약자 편이었고 민중들과 운명을 함께했던 모악산은, 오늘도 산이 아닌 어머니의 품으로 미래의 희망을 틔우고 있다.

자연과 바다가 그린 수채화, 고군산군도

군산 앞바다 60여 개 섬들이 무리를 이룬 고군산군도. 바다 한가운데 병풍처럼 둘러선 섬들이 서로 에워싼, 바람 불어도 성내는 법이 없는 곳이다. 그 중심이 선유도, 즉 이름 그대로 '신선이 노니는 섬'이다. 선유도 풍경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곳곳이 아름답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는 것은 망주봉인데, 옛날에 간신들의 모함으로 귀양 온 한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며 매일 바위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았다 해서 망주봉(望主蜂)이라 했다. 해발 104.5m의 이 봉우리에 큰비가 내리면 높은 봉우리에서 7, 8개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장관을 이룬다고 하는데, 여름철에 방문해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절경이다. 망주봉 아래로는 초승달 모양의 완만한 모래 고운 백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그 유명한 '명사십리(明沙十里)'다. 천연 해안사구 해수욕장으로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맑은 모래가 깔려 있다. 해당화가 만발하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지천이었던 예전엔 달 밝은 밤에 명사십리를 보면 평생 그 모습을 잊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옛 모습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지금도 명사십리의 모래 위를 걸으니 정말 신선놀음을 하는 것처럼 즐겁다.

섬과 섬을 잇다, 섬을 건너다

선유도에서 장자대교를 넘으면 장자도와 대장도다. 예전 조기와 멸치잡이가 성했던 장자도는 태풍이 오면 어선이 피하는 고군산군도의 천연 대피항이었다. 환경과 기후 변화로 인해 고군산 앞바다에 형성되었던 어장이 사라진 지 오래라 장자어화(壯子漁火, 선유 8경 중 하나) 만이 한때 이곳이 황금어장이었다는 것을 증언할 뿐이다. 장자어화의 영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전거를 타고 장자대교를 넘어가던 관광객들이 푸른 바다의 풍취에 취해 잠시 멈춰 선다. 선유대교를 건너 무녀도로 들어서면 마을 분위기는 완연히 바뀐다. 선유도, 장자도가 관광어촌의 성격이 짙어졌다면 무녀도는 오롯이 섬사람들만의 삶터다. 오래 전 염전이 성했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태양이 바다를 건너는 시간. 태양이 하루의 마지막 숨결을 섬들의 바다와 갯벌에 토해내 기기 시작한다. 갯벌 위로 황금 그림자 뚝 떨어지더니 하루를 마친 태양이 바다 위에 붉은 안녕을 남기고 열도의 섬들 사이로 고요해진다. 서해 어디인들 낙조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지만, 고군산군도에서 보는 낙조는 아름다움을 넘어 장엄함을 지닌다. 각기 저마다의 전설과 신화를 안고 점점이 떠 있는 섬과섬 사이로 해가 질 때, 하늘과 서해는 온통 새빨간 노을로 적막강산이다. 이 붉은 풍경은 이루어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황홀한 느낌을 주어 보는 이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해가 지고 나니 햇볕 물러난 자리에 바람이 불어온다. 바다를 건너고 갯벌을 넘어온 바람에게 갯벌과 숲은 길을 내주고 제 몸을 숙인다. 숙소로 향하는 길, 바람이 머물고 인적이 숨어버린 선유도의 신선이 놀던 자리에 잠시 백로가 신선 노릇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