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시냑은 신인상주의 화가이자 이론가이다. 팔레트에서 섞지 않은 물감의 색점을 캔버스 위에 찍어, 병치된 색채가 관람자의 눈에서 혼합되게 함으로써 순수하고 밝은 화면을 만들고자 했던 점묘법 혹은 분할주의 기법을 특징으로 하는 신인상주의는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에 의해 개발되었으나,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이후 신인상주의를 이론화하고 실천하여 후대에 이를 알리고, 이 새로운 회화 언어를 수많은 화가들이 시험하게 한 사람은 폴 시냑이었다.

근대 도시의 이미지

파리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폴 시냑은 열일곱 살이었던 1880년에, 조르주 샤르팡티에(Georges Charpentier)의 기획으로 잡지 <라 비 모데르네(La Vie Moderne)> 사무실에서 열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전시를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83년에 로마상 수상자인 아카데미 화가 뱅(Jean-Baptiste Bing)의 화실에 등록하여 그림 수업을 받았으나, 이 사람은 시냑의 회화 양식에 별 영향을 남기지 못했다. 1882~3년에 그린 그의 풍경화와 정물화는 모네와 시슬리(Afred Sisley), 아르망 기요맹(Arman Guillaumin)과 같은 인상파의 영향을 보여준다. 1883년에 그린 <젠느빌리에 거리, 파리 근교(The Road of Gennevilliers, Suburb of Paris)>와 같은 도시 외곽 풍경화에는 인상파적인 양식으로, 멀리 보이는 공장 굴뚝과 같은 근대적인 도시 이미지가 포착되어 있다.

1884년에 시냑은 심사위원이 없는 미술 전시회인 독립미술가전의 창립자 중 하나가 된다. 그 해 5월에 열린 독립미술가전의 첫 연례 전시회에 출품한 400여 명의 화가들 중 조르주 쇠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의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은 시냑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는 아직 점묘가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쇠라는 순수한 색채를 병치하는 분할주의(Divisionism)를 시도하고 있었다. 인상파의 본능적이고 즉흥적인 태도와 완전히 반대되는 쇠라의 색채분할 이론에 의한 그림은 시냑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시냑은 곧 쇠라의 친구이자 제자가 되고 이 두 사람은 서로 연구를 함께 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조언도 주고받았다. 시냑은 쇠라에게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에서 흙색을 쓰지 말고 강렬한 색채의 점을 추가해볼 것을 권했고 쇠라는 실제로 그렇게 작품을 수정했다. 1885년에 쇠라는 시냑에게 분할주의를 써볼 것을 권했다. 1886년이 되면 두 화가 모두 점묘법(Pointillism)을 사용하게 된다.

시냑은 당대의 실내 정경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색채 분할과 점묘를 실험했다. 무정부주의자와 잡지 <레뷔 앵데팡당> 관련자들과 어울렸던 시냑은 그에 대해 글을 몇 편 쓴 적인 있는 작가 펠릭스 페네옹과 친해지게 된다. 페네옹은 쇠라의 1886년 작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보고 이 회화에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라는 이름을 붙였다. 늘 자신감에 차있고 명석한 대화에 능했던 시냑은 이제 신인상주의의 대표적 선전가가 되었다.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와 시냑의 친구였던 그의 아들 루시앙 피사로(Lucien Pissaro)도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을 적극 수용했다.

1886년경에 시냑은 반 고흐(van Gogh)를 만나 교류를 했고 반 고흐의 1887년 작품 <아스니에르 다리>와 같은 작품에는 특유의 주관적인 색채, 감정적인 붓 터치와 함께 시냑의 분할주의에서 받은 영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시냑은 야외 풍경을 주로 그려 규칙적으로 전시를 했다. 독립 미술가전에는 1884년부터 1893년까지 매년 출품했고, 1886년에는 피사로의 초대로 마지막 인상파전에도 작품을 냈다. 1888년부터는 브뤼셀에서 열린 레뱅(Les XX)전에도 그림을 보냈고, 1892년부터는 수채화 작품도 전시하기 시작했다(그의 개인전은 1902년이 되어서야 파리의 지그프리드 뱅(Siegfried Bing) 화랑에서 처음 열렸다).

색채의 모자이크가 만드는 리듬

다른 신인상파 화가들처럼 시냑도 활동 초기 20여 년 동안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의 작품을 꾸준히 지지해 준 것은 페네옹과 아르센 알렉상드르, 앙트완 드 라 로세푸코(Antoine de la Rochefoucauld) 등 소수의 평론가들뿐이었다. 시냑은 활동 초기에 확립한 핵심 원칙을 지키면서 자기 양식을 꾸준히 개발했다. 신인상주의 대의 안에서 그의 주제는 초기의 야외 풍경에서 점점 사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1890년대 초에는 작품 제목에 음악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도입하기도 하고, <우물가의 여인들(Women at the Well)>의 전경에서처럼 추상적인 장식 모티브를 화면에 도입해, 시각적인 리듬감을 만들어 내는 데 힘을 쓰기도 했다.

1893년 작품 <양산을 든 여인>의 모델은 그가 1892년에 결혼한 베르트 로블레이다. 결혼 이후 그는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생 트로페(St. Tropez)로 이주하여 평생의 취미가 된 항해를 시작했다. 그의 항해 여행은 생 트로페의 집을 출발하여 파리의 거의 모든 항구와 이탈리아, 네덜란드, 콘스탄티노플 등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여행에서 본 모티브를 스케치하여 작업실로 돌아와 유화로 수많은 바다, 항구 풍경화를 완성했다. 1913년에 시냑은 생 트로페에서 가까운 휴양 도시 앙티브(Antibes)에 집을 빌려 잔느(Jeanne Selmersheim-Desgrange)라는 여성과 동거하고 그녀가 그의 딸을 낳는다. 베르트에게는 파리와 생 트로페의 집들을 넘겨주고 둘은 평생 친구로 지냈다.

색채 분할의 철학자

시냑은 다다(Dada)와 추상화가 나온 이후까지 살았으나 한 번도 추상 회화를 그렸던 적은 없다. 그러나 신인상주의에 기반한 순수한 형식미를 추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색채 분할은 체계라기보다 하나의 철학"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신인상주의는 그가 평생 지킨 세계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대의 안에서 양식의 변화는 있었다. 초기 회화에서 대담하게 병치되었던 밝은 색채는 1905년경부터 좀 더 가라앉은 색조의 조화로 바뀌었다. 쇠라의 색점보다는 항상 컸지만 초기에는 비교적 작은 편이었던 색점도 점점 커져서 거의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의 모자이크와 같이 되었고, 그 모양과 크기는 그림에 따라 달라졌다.

분할주의를 창시하고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만든 것은 쇠라지만, 이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시냑이었다. 그는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용킨트(Johann Barthold Jongkind)의 수채화들을 연구, 수집하고 이를 묶어 1927년에 펴낸 책에 수채화에 대한 주목할 만한 시각을 보여준 이론가이기도 했다. 이론가로서 시냑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된 것은 1899년의 저작 <들라크르와에서 신인상주의까지>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신인상주의를 방어하고 그 역사적 자리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 책은 분할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솟아올랐던 1900년부터 1910년 사이에 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주요한 자료였다. 프랑스의 화가들뿐 아니라 1903년에 나온 번역본을 접한 독일의 화가들도 이 책을 널리 읽었다. 이 책과 시냑의 그림은 이탈리아에서 미래파 화가들(Fururists)로 하여금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게 하기도 했다. 1904년에 생 트로페에서 시냑과 함께 작업한 마티스(Matisse)를 비롯한 야수파들(Fauves)도 그 책에서 색채의 자유에 대한 근거를 찾았고, 같은 면에서 들로네(Robert Delaunay)와 쿠프카의 작품에서도 그의 영향이 나타난다.

자료협조 : 네이버(글 김진희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