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공간
지방정부 남북교류협력의
방향과 과제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후부터 지방정부가 남북 간 교류협력의 주체가 되면서 그 역할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정책으로 지방정부의 역할이 줄어들게 되었고,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지속되면서 그 관계마저 단절된 지 10년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정부가 고민해야 할 남북교류의 방향과 과제는 무엇일까. 남북교류의 시작과 그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앞으로 지방정부와 북한이 어떻게 교류하고 협력해야 할지 살펴보도록 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고문,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남북교류협력특별위원회 위원 배기찬
냉전이 종식된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하고 민간에서는 대북접촉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에서 남북관계를 일괄 통제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1990년 8월 남북 사이의 상호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남북은 1991년 9월 유엔에 동시가입하고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극심한 기아사태는 남한의 민간단체를 대북지원의 핵심으로 부상시켰다. 1995년 8월 심각한 수해를 당한 북한은 국제사회에 긴급구호를 요청했고 유엔은 대북지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1996년 6대 종단(기독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천주교)과 시민사회단체는 국민운동조직을 만들어 대북지원활동을 강화했고, 이후 민간단체의 대북지원활동의 자율성이 강화되었다. 1999년 2월에는 민간단체가 독자적으로 직접 지원할 수 있는 ‘대북지원 창구다원화’ 조치가 취해졌다. 같은 해 10월에는 민간단체에서 인도적 대북지원사업을 통해 남북협력기금을 지원하게 되었다.
1995년 남한에서 지방자치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되면서 남북관계도 바뀌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기와 일치하는 민선2기 지방정부가 1998년 6월에 출범하였고, 다음해인 1999년에 대북지원 창구다원화 조치가 취해졌다. 그 결과 지방자치단체가 대북교류협력사업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올랐다.
분단도이자 접경도인 강원도를 필두로 제주도, 경기도 등이 대북교류협력을 선도했다. 지방자치단체장만이 아니라 지방의회와 지방교육자치제도 조례제정과 기금마련 등을 통해 남북 간 교류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바야흐로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이 선(線)과 면(面)의 단계를 뛰어넘어 입체(立體)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남북 간 교류협력 주체로서의
지방자치단체 등장
1998년 강원도를 필두로 지방자치단체가 대북교류협력의 새로운 힘으로 등장하자 2003년 중앙정부는 남북교류협력사업에 대한 방침을 세웠다. 지자체는 직접 남북교류협력사업을 하지 못하게 하고 민간단체를 통해서만 사업이 가능하도록 한 것. 이후 2010년 5.24 조치로 남북 간의 교류협력이 중단되기까지 지자체의 대북 교류협력사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먼저 대북교류협력사업의 주체는 민간단체이다. 그러나 이 민간단체는 지자체의 사업을 대행하는 일종의 대행사 역할을 했다. 즉 대행사인 민간단체가 통일부(중앙정부)로부터 사업승인을 받으면 실질적인 주체인 지자체와 결합해서 사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회로부터 각종 조례·예산·정책심의 등의 협조를 받고, 자문기구로부터는 자문을 얻는다. 구체적인 추진에서 교류협력사업에 필요한 비용은 지자체의 남북협력기금과 함께 중앙정부의 남북교류협력기금이 매칭펀드의 형식으로 사용된다.
민간단체를 앞세운 남한 지자체가 남북교류협력사업을 함께 추진한 북한 측 파트너는 북한의 지자체가 아니라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이다. 남한의 순수한 대북 인도적 지원단체, 지자체와 결합한 민간단체, 직능단체 등이 북한과 교류협력을 할 때 민화협이 시행사 역할을 했다. 즉 민화협이 전체 남북교류협력사업의 계약, 관리, 감독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시기 남북관계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은 중앙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왜 이렇게 무시되었을까? 지자체의 대북지원활동의 경험부족, 대북지원활동에 대한 불신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를 대북정책의 경쟁자로 인식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광역지방자치단체뿐만 아니라 기초지방자치단체도 자체의 공무원과 연구원 그리고 예산과 주민동원 능력에 의해 대북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능력을 가진 지방자치단체가 대북정책에 힘을 쏟을 경우 중앙정부의 대북정책은 통제력을 상실하고 혼란이 심화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북한에서 본격적으로 핵미사일을 개발하자, 이에 대응하여 남한에서는 5.24 조치를 취하면서 남북 간 교류협력은 10년 동안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다 2018년 남북정상이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에 합의하면서 남북교류협력에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유엔안보리가 핵무력을 완성한 북한을 강력하게 제재하고 북한과의 비핵화협상을 중단하면서 오늘날 남북관계는 지난 10년 동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30년 만에 ‘남북교류협력의 안정성과 지속성 보장’, ‘민간·지방자체단체의 자율성 확대’, ‘법치행정 강화’ 등 세 가지의 방향으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지방자치단체’를 교류협력사업의 주체로 법률에 명시하는 것과 함께 ‘지방자치단체 남북교류협력정책협의회’를 법률에 명시하는 것이다.
남북교류협력법의 개정과 지난 시기에 전개된 남북교류협력의 경험을 고려할 때, 향후 남북교류협력의 방향과 과제는 다음과 같이 설정될 수 있다.
첫째,
남북교류협력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위상과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구체화한다.
지난 30년간 남북교류협력의 역사를 보면 민간단체가 소규모의 사업을 전개하고 중앙정부는 대규모 사업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남북 상황은 민간단체의 입지를 매우 축소시켰고, 오늘의 국제관계는 중앙정부의 역할을 매우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남북 교류협력사업에서 지방자치단체 즉 지방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민간의 한정된 자원과 국제연합인 유엔의 제재라는 틀 속에서 지자체는 어떤 사업을 어떻게 전개할지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시도지사협의회 남북교류협력특별위원회와 통일부는 공동으로 노력해서 적극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지자체와 지자체 간,
지자체와 중앙정부 간에 긴밀한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7개의 광역지자체와 226개의 기초지자체가 있다. 이들은 거의 모두 자체적으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고, 일부 지자체는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조례를 근거로 독자적인 대북 교류협력사업에 나설 경우 매우 심각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조율하고 조정하는 협의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광역지자체이다. 광역지자체는 대북 교류협력을 위해 소속 기초지자체와 협의체를 만들고, 이에 민간이 결합하는 형태를 구상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광역지자체들은 시도지사협의회 남북교류협력특별위원회 및 통일부 소속 지방자치단체 남북교류협력정책협의회를 중심으로 협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협의체를 통해 지자체들은 공동사업 발굴, 공동기금 조성 등을 논의할 수 있다.
셋째, 남측의 지자체들이 교류협력할 수 있는
북측의 파트너를 명확히 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우리의 광역지자체에 북한의 광역 시도를 연결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광역지자체는 17개이지만 이를 결합하면 10개의 광역(서울, 인천경기, 강원, 충북, 대전세종충남, 전북, 광주전남,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제주)으로 축소할 수 있다. 여기에 북한의 광역 10개 시도(평양, 개성황북, 황남, 평남, 평북, 자강, 양강, 함남, 함북)를 1대 1로 매치할 수 있다. 그러면 기초지자체들은 북한의 광역행정기관 안에서 해당 시군을 대상으로 협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 지방행정기관별 협력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전례에 따라 북한의 민화협이 지자체의 협력 파트너로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북한의 민화협이 남북 교류협력의 시행사 역할을 한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남북의 각 지방행정기관이 파트너가 될 수 있도록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은 한국의 30개 도시와 대북교류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앞으로 ‘경문협’이 한국의 도시와 북한의 도시가 직접적으로 교류협력사업을 할 수 있도록 북한의 어떤 기관을 파트너로 선정할지가 매우 중요하다.
지난 10년간 북한의 핵무력 완성과 유엔제재로 남북 간 교류협력의 환경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렇게 악화된 조건 속에서 남북 간의 교류협력을 촉진하고 이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전례 없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이 일에 통일부만이 아니라 시도지사협의회와 산하 남북교류협력특별위원회도 막중한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