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발표된 한 전문연구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2번째로 갈등지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높은 나라는 종교 갈등이 심각한 터키로 갈등지수 1.27로 집계되었고, 우리나라 지수는 0.72로 전체평균 0.44 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갈등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사회분열은 심화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갈등비용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갈등으로 인한 경제손실액이 적게는 82조원에서 많게는 24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는데, 갈등비용 246조원은 우리 정부의 2014년 한해 예산총액 355조의 70%에 달할 만큼 큰 액수이다. 사회갈등지수가 10%만 낮아지면 1인당 GDP가 1.8~5.4% 높아지고, OECD 평균만큼 갈등을 줄일 수 있다면 7~21% GDP 증가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갈등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숙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셈인데, 수출과 산업개발, 경제개발을 통한 국가 소득증대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갈등극복의 노력을 병행할 때만이 경제성장의 효율성도 높이고, 진정한 의미의 일등국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공공정책 결정에 앞서 주민참여와 토론을 통해 갈등소지를 사전에 줄임으로써 공공갈등이 극단적인 대립으로까지 치닫지 않도록 갈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제도를 한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독립성과 중립성을 기반으로 1997년 설립된 프랑스 공공토론위원회(CNDP)가 바로 그것인데, 원자력발전소 설치, 철도건설, 공항, 항만 건설, 고압송전선 설비 같은 중요 국가사업을 결정하는데 있어 공공토론 과정을 의무절차로 법제화하고 이를 담당하는 독립행정 기구 CNDP는 지난 15년 남짓 프랑스 공공정책 결정에 있어 갈등을 줄이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CNDP 설립 배경 – 공공정책 결정에 주민참여 필요성 대두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도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하였다. 개발과 성장을 내세워 공공정책을 결정했던 이 기간 동안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 대규모 국가사업이 일방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국가와 기업, 주민, 각 사회단체 사이 갈등이 생겨났고, 1970년대 들어 환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종전의 개발우선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도로, 철도, 항만과 같은 대규모 사회기반시설의 경우 정부와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공사계획 자체가 장기간 지연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되는데, 지중해 노선 TGV 건설을 두고 5년 동안 건설부 장관 4명이 바뀔 정도로 사회, 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된 바 있었고, 루아르 강 재개발 사업은 환경보호론자의 반대로 11개의 보 건설계획 중 3개가 취소되고 이미 건설되었던 2개의 보를 해체하는 사례까지 빚었다.
이러한 위기를 겪으면서 공공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성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정부가 주도하여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기 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미리부터 형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도 잇따랐다.
마침내 1995년 “바르니에 법 Loi Barnier”이 제정되었고, 국익성 사업의 심의과정에 공공토론 형태로 대중의 참여 원칙을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바르니에 법이 정한 대중참여 장치로서 설립된 된 것이 바로 CNDP (Commission Nationale du Debat Public)이며 처음에는 환경개발부 산하기구로 1997년 발족하였으나 2002년부터 독립행정기구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CNDP의 지위 - 독립행정기구
프랑스 공공기구 중에는 정부예산으로 운영되지만 구성과 조직, 예산 등이 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업무를 수행해 나가는 기관을 독립행정기구 (Authorité administrative indépendante)로 명명하고 있다. 1987년 처음 도입되어 2002년 법제가 강화된 독립행정기구는 상하 계층 간의 지휘와 감독을 통해 운영하는 전통적인 행정기구와는 달리 정부나 국회, 자치단체 등 모든 공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특정 분야의 조율업무를 독자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조직이다.
CNDP는 국민의 권익보호와 조율이라는 업무분야를 담당하는 독립행정기구로서 대통령이 회장을 임명하지만 정부가 바뀌어도 중도 해임이 불가능하도록 임기가 보장되어 있고 전체 2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 위원 또한 공공과 민간분야에서 대표자를 각각 임명하여 운영하고 있다.
CNDP 조직구성
CNDP 연간 예산
CNDP의 예산은 정부 공공예산에 속하지만, 환경 및 지속가능개발부 경상예산 속에 독립계정으로 편성된다. 2011년의 경우 2,356,438유로(약 33억원)의 예산을 편성하여 1,711,447유로를 지출하였고, 2012년은 2,396,251유로 예산에 1,582,612유로를 지출하였다.
CNDP의 기능
CNDP의 주요 활동은
①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의 계획수립 단계에서부터 대중의 의견수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대중 참여방식을 결정하여 공공토론회를 조직하고,
② 필요시 토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각종 전문자료를 보충하고,
③ 토론장에서 이해당사자와 일반대중이 골고루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발언 기회의 형평성을 유지하며,
④ 토론 결과를 종합하여 사업 시행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사업주체가 그 결과를 고려하여 사업의 지속이나 변경 여부를 결정하도록 권고하는 데 있다.
CNDP의 중립성과 투명성
중립성은 CNDP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원칙의 하나로 위원회가 토론 과정에 자체 의견을 개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CNDP는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에, 토론회를 조직하고 진행하지만 조직자의 역할만을 담당할 뿐 의견을 첨가하고 유도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4~6개월간 공공토론을 진행한 후 토론 결과를 모두 종합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CNDP의 자체의견을 반영할 수 없고, 개진된 모든 의견을 첨삭 없이 보고될 수 있도록 투명성을 보장해야 한다. 종합 보고서는 사업 발주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모두 공개되게 된다.
공공토론회 조직 대상 사업
① 공공토론회 의무회부 대상
· 원자력 발전설비 신규 건설
· 사업비 3억 유로(약 4천억 원) 이상의 도로 건설
· 총 연장 40km 이상 철도건설
· 사업비 1억 유로 이상의 비행장 건설 및 확장
· 400kV 이상 총연장 10km 이상 송전선 설치
· 직경 500mm 이상 총연장 200km 이상 송유관 건설
② 기타 선택적 공공토론회 조직
· - 사업비 규모로는 의무회부 대상이 아니지만 공익성 정도와 사업 영향력을 감안 발주자가 자발적으로 신청하는 경우 (국회, 지방의회, 사회단체에서도 신청 가능)
- 국가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정규모 이상의 민간사업
공공토론회 진행 절차
공공토론 진행상 특징
공공토론회 조직이 결정된 후 사업계획에 대한 상세 자료를 수집한 뒤, 4개월에 걸쳐 토론회 일정을 수립한다. 의견수렴이 충분치 않을 경우 CNDP는 토론기간을 2개월 연장할 수 있다. 토론회 개최 회수는 사안에 따라 달라지는데 보통 20~40회 정도 토론회가 진행된다.
이때 주의할 점은 다양한 의견 발표와 청취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토론회를 진행하는 데 있다. 사업 발주자가 계획의 정당성을 일방적으로 홍보하는 자리가 돼서는 안 되며, 이를 반대하는 단체에서 계획폐지를 위해 항의하는 시위장이 돼서도 안 된다.
CNDP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서 중요해지는데, 아무리 작은 소수의 의견이라도 모든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토론회를 진행해야만 한다. 찬성과 반대 의견을 모아 찬반투표처럼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CNDP는 맹목적인 찬성과 반대의사 발표에 대해서는 발언을 금하고 있다.
공공토론회는 정답을 제시하기 위해 조직한 자리가 아니며 사업 발주자를 포함하여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 모든 의견을 말하고, 듣고, 성찰하게 하는 자리이다.
결과 보고서와 구속력
다양한 의견을 종합하여 첨삭 없이 정리한 CNDP 종합보고서는 사업주체에게 통보되지만 이를 반영해야만 하는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과를 통보받은 사업자는 3개월 이내에 사업 지속여부 및 변경 사항을 결정하여 대중에게 발표하고 CNDP에도 통보하게 되는데, CNDP 측 발표에 따르면 최근 공공토론회를 실시한 37개 사업의 경우 토론을 통해 제시된 대안을 선택한 사업이 15건이고, 사업내용을 수정한 경우가 11건, 원안 그대로 추진한 경우는 7건이었고, 나머지 4건은 사업자체를 취소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CNDP 토론은 양방향 소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토론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만든다. 원안을 변경한 경우가 70%에 달한다는 점을 볼 때, 토론 결과가 비록 법적인 구속력이 없을지라도 토론과정을 청취한 사업자는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당초의 추진계획을 변경할 만큼 공공토론회에 대한 신뢰를 얻고 있다.
토론회 개최 비용 vs 갈등비용
토론회 1회 평균 1백만 유로(약 1천4백만원) 정도 비용이 소요된다. 토론기간 만큼 사업 추진 역시 늦어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회비용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CNDP 측 주장은 다르다. 1백만 유로가 더 들더라도, 사업기간이 1년 더 연장되더라도 보다 합리적인 수정안을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공공토론 과정 없이 사업을 강행함으로써 사업비 10억 유로와 4~5년 공사기간을 낭비할 수도 있고, 이보다도 지역사회의 갈등과 분열로 인한 피해는 더욱더 심각할 것이다. 토론은 바로 선진 민주사회가 지향해야할 정책 결정의 과정이다. 좀 더디지만 확실하게,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 결정의 근간을 CNDP가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2013년 개최 공공토론회 및 비용 내역
공공사업에 있어 갈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단지 그 갈등을 흡수하고 극복할 수 있는 장치가 있느냐에 따라 선진국과 후진국이 구분될 것이다. 갈등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면 후진국 행정에 머물 것이고, 갈등 당사자들 간의 소통을 통해 최대한 합의를 도출해 나간다면 선진국 행정이 될 것이다.
소통은 양방향을 전제로 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정책결정 과정에 여론 수렴을 중시하는 여러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도 사업 검토 단계부터 양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지 않고 관점이 다른 사람의 의견도 충분히 경청하게 할 수 있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갈등을 미리부터 줄일 수 있는 프랑스 공공토론회 CNDP와 같은 소통과 성찰의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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