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에히메현(愛媛県) 니이하마시(新居浜市)는 시코쿠(四国)지역 굴지의 공업도시이다. 그 축이 된 것이 벳시동산(別子銅山)이다. 에도시대부터 283년간 65만톤의 동을 산출, 산업근대화에 기여했다. 이러한 사업의 중심이 된 벳시 동광을 일관해서 경영하고 있던 것이 스미토모가(住友家)로 현재의 스미토모 그룹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1973년 폐산하고 나서도 거기에서 파생한 화학공업, 중기계공업, 토목 건설업, 임업 등으로 발전하여 현재도 동시의 산업으로서 뿌리 내리고 있다.
이곳에는 동 산출 초기의 수공업시대부터 기계공업으로 전환해 나가는 역사가 여러가지 형태로 남겨져 있어 이것들을 근대화산업유산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이 1990년부터 본격 시동하였다.
채굴에 사용된 소형기관차
■ 사업내용
1691년 문을 연 벳시동광은 두께 2.5m, 폭 1,000m의 광맥이 지하를 향해 깊게 발달한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대규모 동맥이었다. 스미토모가에 의해 채굴을 시작하여 1973년 폐산할 때까지의 283년간, 총량 65만톤의 동을 산출하여 산업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채굴은 해발 1,300m에서 해면하 1,000m, 갱도는 총연장 700km에 이르고 있다. 채굴진행의 거점이 되는 채광본부도 산정상에서 서서히 산기슭으로 옮겨졌다. 이윽고 해면하 1,000m에 이르면 지열과 지압의 상승에 의해서 작업 환경은 위험한 상태가 되어 최종적으로는 하데바(현재의 마인트피아 벳시)에서 막을 닫게 되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283년. 그 사이에는 채광방법이나 반출·운반방법에도 큰 변천이 있어 산업이나 노동자의 생활에 관련되는 인프라도 변화, 이동해 왔다. 이러한 흔적이 지금까지 시내에 광범위하게 남겨져 있어 에도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산업·문화의 역사를 비유하는 귀중한 유산이 되고 있다.
니이하마의 특징은 폐산후도 벳시동산을 모체로서 파생한 산업(화학, 임업, 중공, 전력 외)이 현재도 생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에 있다. 광맥이 머지않아 없어지는 것을 예측한 스미토모에서는 채굴만이 아니라 제련 그 외의 기술개발, 항만의 정비, 신공장 개설, 식림 등 미래를 예측한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각지에서는 광산의 폐산 후에 마을의 산업 그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케이스가 많은 가운데 , 주변 산업을 낳는 것에 성공한 니이하마시는 현재도 시코쿠 굴지의 공업도시로서 존속하고 있다.
이러한 것에서 한번 더 “동의 역사 발굴”을 하려고 1986년 니이하마 청년 회의소가 중심이 되어 조사 사업을 개시하였고, 1990년 개갱 300주년 기념 이벤트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동의 마을 만들기가 출발했다. 벳시동산을「산업 유산」이라고 하는 관광 자원으로서 활용하기 위해서 동광을 산출하는 산의 역사의 거점이 된 연고의 땅을 정비하여 새로운 관광 시설을 설립해 갔다.
<주요 관광시설>
1991년「마인트피아 벳시·하데바 존」개설
1994년「마인트피아 벳시·토우헤이 존」개설
<주요 학습시설>
1990년「스미토모 화학 역사 자료관」개설(민간)
1992년「벳시동산 기념도서관」개설(기증)
1993년「스미토모의 숲·포레스타하우스」개설(민간)
1994년「에히메현 종합 과학박물관」개설(에히메현)
1997년「히로세 역사 기념관」개설
■ 사업효과
지역민의 일부 이외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던 「벳시동산」이 귀중한 산업유산으로 연구자들에게 지적된 것을 기회로 1986년 니이하마 청년 회의소가「동(銅)경의 마을 만들기」를 시작. 각종 보고서에 의해서 그 가치를 재확인하여 1990년「벳시동산 오픈 300기념식전」「벳시동산 산업문화 포럼」을 개최하였다.
폐산으로부터 27년이 경과하였지만 300년이라는 것이 지역내외에 크게 어필되었다. 당시는「산업 유산」이라고 하는 말이 없어 전국에 앞장 선 대응으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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